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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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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는 마케도니아의 장군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에 참여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권력 투쟁(디아도코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바빌론을 차지하고, 셀레우코스 제국을 건국했다. 그는 영토를 확장하고 도시 건설에 힘썼으며, 마우리아 제국과 협정을 맺어 동방 영토를 안정시켰다. 코루페디온 전투에서 리시마코스를 격파하고 알렉산드로스 제국 재통일에 근접했으나, 암살당했다. 그의 사후 아들 안티오코스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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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남성 흉상
로마 제국 시대의 로마 작품으로, 헬레니즘 모델을 바탕으로 시리아 작업장에서 제작되었다.
군주 칭호바실레우스 왕중왕 땅의 왕 아시아의 군주 }}
왕조셀레우코스 왕조
출생기원전 358년경
출생지에우로푸스, 마케도니아 (현재의 에브로포스, 그리스)
사망기원전 281년 9월 (77세)
사망지리시마키아, 트라키아 (현재의 카바쾨이, 차나칼레, 튀르키예)
매장지셀레우키아, 니카토레이온
통치
즉위기원전 305년
이전 통치자알렉산드로스 4세
후임 통치자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 (기원전 292년경부터 공동 통치)
가족 관계
아버지안티오코스
어머니라오디케
배우자아파마
스트라토니케
자녀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
아카이오스
필라
기타 정보
영어 이름Seleucus I Nicator
그리스어 이름Σέλευκος Α' Νικάτωρ

2. 생애

셀레우코스 1세는 마케도니아필리포스 2세 휘하의 귀족이자 장군이었던 안티오코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군사적 관심이 많았던 그는 마케도니아군에 입대하여 점차 입지를 다져갔으며, 훗날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눈에 띄게 되었다. 특히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 때 이수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여하였다.[35]

기원전 324년 수사에서 열린 그리스인과 동방인의 집단 결혼식에서 셀레우코스는 스피타메네스의 딸 아파메와 결혼했다. 다른 마케도니아 장교들이 알렉산드로스 사후 동방인 아내를 버린 것과 달리, 셀레우코스는 아파메와 평생 함께했다. 이는 훗날 그의 동방 지배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12]

2. 1.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

셀레우코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페르시아 원정 당시 왕립 힙파스피스타이를 이끌었다.


기원전 334년 봄, 약 23세의 젊은 셀레우코스는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아시아로 건너갔다.[35] 기원전 327년 말에 시작된 알렉산드로스의 인도 원정 시점에 셀레우코스는 마케도니아 군대의 정예 보병 군단인 "방패병" (''힙파스피스타이'', 후에는 "은방패"로 알려짐)의 지휘관으로 승진했다. 아리아노스는 알렉산드로스가 배를 타고 히다스페스 강을 건널 때, 페르디카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 리시마코스와 함께 셀레우코스도 동행했다고 전한다.[10] 그 후 벌어진 히다스페스 전투 (기원전 326년)에서 셀레우코스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포루스 왕의 코끼리 부대에 맞섰다. 셀레우코스는 전투 계획에 실제로 얼마나 참여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는 그가 전투 동안 주요 독립 지위를 맡았다는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크라테루스, 헤파이스티온, 페이톤, 레오나투스는 각각 상당한 규모의 분견대를 통솔했다는 기록과 대조적이다.[11] 셀레우코스의 왕립 ''힙파스피스타이''는 알렉산드로스의 감시 하에 있었고, 그의 지휘에 따라 움직였다. 그들은 나중에 인더스 계곡 원정과 말리족 원정에서 벌어진 전투, 그리고 게드로시아 사막 횡단에 참여했다.

기원전 324년 봄 수사 결혼식에서 셀레우코스는 스피타메네스의 딸인 아파마와 결혼했다. 그들은 장남이자 후계자인 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를 낳았으며, 적어도 두 명의 적법한 딸(라오디케와 아파마)과 다른 아들(아카이오스)을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 같은 행사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3세의 딸과 결혼했으며, 다른 여러 마케도니아인들도 페르시아 여성과 결혼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기원전 323년), 다른 주요 마케도니아 장교들이 "수사 아내"를 대거 내팽개쳤을 때, 셀레우코스는 아내를 곁에 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으며, 아파마는 평생 그의 아내(후에는 여왕)로 남았다.[12]

셀레우코스는 마케도니아 왕국 귀족 안티오코스의 아들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신하로 섬기며 대왕의 동방 원정에 참가하여 활약했다. 그러나 다른 대왕의 후계자(디아도코이)들에 비하면 당시에는 존재감이 미미했는데, 알렉산드로스의 생애에 관한 사료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아리아노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동정기』에서도, 셀레우코스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326년 히다스페스 강 전투 장면이다. 당시 그는 중기병 (헤타이로이)의 일원이었으며, 왕의 근위 보병 부대 지휘관이었다.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가 바빌론으로 귀환한 후, 그의 죽음을 예고하는 불길한 사건들이 잇따라 일어났는데, 그중 하나에 셀레우코스가 등장한다. 알렉산드로스가 함대를 이끌고 바빌론 남쪽의 늪지를 항해하던 중, 그가 쓰고 있던 모자와 디아뎀이 바람에 날려 늪의 갈대에 걸렸다. 동시대인 아리스토브로스의 기록에서는 한 명의 뱃사공이 이 디아뎀을 왕에게 전했다고 전해지지만, 다른 전승에 따르면 디아뎀을 왕에게 건넨 것은 셀레우코스였으며, 그가 왕의 권위의 상징을 손에 넣은 것은 훗날 그가 왕위를 획득할 전조였다고 한다. 그 후, 알렉산드로스의 죽음 직전에, 왕의 치유를 기원하기 위해 세라피스 신전에 참배한 사람들 중에도 셀레우코스의 이름이 보인다.

3. 디아도코이 전쟁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바빌론에서 갑작스럽게 죽자 후계자 문제로 혼란이 발생했다. 페르디카스록사네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기다리자고 주장했고, 결국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와 갓난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가 공동 왕으로 옹립되었다. 페르디카스는 왕국의 섭정이 되었고, 바빌론 회의를 통해 제국 각지의 사트라프 자리를 분배했다.

셀레우코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인도 원정에서 정예 보병 군단인 "방패병" (''힙파스피스타이'', 후에는 "은방패"로 알려짐)의 지휘관이었다. 히다스페스 전투 (기원전 326년)에서 셀레우코스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포루스 왕의 코끼리 부대에 맞섰다.[10] 수사 결혼식에서 셀레우코스는 스피타메네스의 딸인 아파마와 결혼하여, 장남 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를 낳았다.[12]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견된 셀레우코스 동상 청동상의 로마 시대 복제품 (현재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


페르디카스 사후, 안티파트로스가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 되었다. 페르디카스의 반대파들은 트리파라디소스 조약을 통해 제국을 다시 분할했다.[16] 셀레우코스는 풍요로운 바빌론 속주를 하사받았지만, 군사력은 미미했다.[16] 펠라의 아르콘이 바빌론의 사트라프로 있었으나, 페르디카스는 도키모스를 후임자로 지명하려 했다. 셀레우코스는 도키모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바빌론을 차지했다.[18]

제국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메디아의 사트라프 페이톤은 세력을 확장하려 했고, 안티고노스와 에우메네스는 전쟁을 벌였다. 셀레우코스는 바빌론 자체의 문제와 여러 세력 다툼 속에서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그는 금품과 뇌물로 바빌론 사제들을 매수하여 영향력을 확보했다.[18]

기원전 316년, 파라에타케네 전투가비에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를 패사시켰지만, 셀레우코스는 안티고노스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다. 영토 재분배 문제로 안티고노스와 결별한 셀레우코스는 기원전 315년 바빌론을 탈출하여 이집트로 도망쳐 프톨레마이오스와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312년 가자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와 함께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를 격파한 셀레우코스는, 안티고노스가 시리아로 출진한 틈을 타 동방으로 귀환했다. 바빌론 주민들의 지지를 받은 셀레우코스는 같은 해 10월 1일 바빌론을 회복했고, 이는 일반적으로 '''셀레우코스 제국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이후 셀레우코스는 안티고노스의 공격을 받았지만, 티그리스 강변에서 니카노르를 격파하여 바빌로니아의 지배를 확립했다(바빌로니아 전쟁). 셀레우코스는 기원전 305년에 중앙 아시아·인도 방면으로 군대를 진격시켰다. 인더스 유역에서 마우리아 왕조의 찬드라굽타와 협정을 맺고, 간다라게드로시아 등을 할양하는 대신 500마리의 전차를 획득했다.

기원전 301년 아나톨리아 중부의 이프소스 전투에서 셀레우코스 1세와 리시마코스 연합군은 안티고노스 1세와 데메트리오스 1세 부대를 격파했다. 셀레우코스는 찬드라굽타에게서 받은 전차를 활용하여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안티고노스는 전사했으며 데메트리오스는 패주했다. 이 승리로 셀레우코스는 아시아에서의 패권을 확립했다.[58]

셀레우코스 1세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 (뒷면에는 승리의 여신 니케가 그려져 있다)

3. 1. 바빌론 분할과 트리파라데이소스 협정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바빌론에서 갑작스럽게 죽자, 명확한 후계자가 없어 혼란이 발생했다. 페르디카스록사네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기다리자고 주장했고, 결국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와 갓난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가 공동 왕으로 옹립되었다. 페르디카스는 왕국의 섭정이 되었고, 바빌론 회의를 통해 제국 각지의 사트라프 자리를 분배했다. 이 때 프톨레마이오스이집트를, 셀레우코스는 페르디카스 암살에 대한 보상으로 풍요로운 바빌론 속주를 받았다.[16]

하지만 페르디카스는 권력욕으로 인해 안티파트로스의 딸과 이혼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누이와 재혼하려 했고, 이는 안티파트로스, 크라테로스, 안티고노스, 프톨레마이오스의 반란을 야기했다. 기원전 320년 프톨레마이오스 군대가 대왕의 관을 탈취하면서 양측의 대결이 시작되었고, 이후 〈트리파라데이소스 협정〉을 통해 전후 처리가 이루어졌다. 안티파트로스가 새 섭정이 되었고, 리시마코스트라키아를, 셀레우코스는 바빌론을 받았다.[16]

트리파라디소스에서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안티파트로스를 살해하려 했으나, 셀레우코스와 안티고노스가 이를 막았다.[17] 셀레우코스의 바빌론은 페르시스의 페우케스타스, 수시아나의 안티게네스, 메디아의 페이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바빌론은 부유했지만 군사력은 약했고, 안티파테르는 동부 속주를 분할하여 어느 사트라프도 다른 사트라프보다 강해지지 못하도록 견제했다.[16]

펠라의 아르콘이 바빌론의 사트라프로 있었으나, 페르디카스는 도키모스를 후임자로 지명하려 했다. 도키모스는 셀레우코스에게 바빌론을 넘겨줄 의향이 없었고, 셀레우코스가 어떻게 바빌론을 빼앗았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바빌론 연대기에 따르면 기원전 320년 여름이나 겨울에 도시의 중요한 건물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셀레우코스는 기원전 320년 10월 또는 11월에 바빌론에 도착했고, 도키모스는 전투 후 탈출했다.[18]

제국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메디아의 사트라프 페이톤은 파르티아의 사트라프를 암살하고 세력을 확장하려 했고, 안티고노스와 에우메네스는 전쟁을 벌였다. 셀레우코스는 바빌론 자체의 문제, 에우메네스와 안티고노스의 위협, 페이톤과 그의 반대자들 사이의 갈등 등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그는 금품과 뇌물로 바빌론 사제들을 매수하여 영향력을 확보했다.[18]

기원전 319년 안티파테르가 죽은 후, 페이톤은 대규모 군대를 소집하여 세력을 확장하려 했으나, 다른 사트라프들의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에우메네스와 안티고노스의 대립 속에서, 셀레우코스는 기원전 316년 봄, 에우메네스를 수사까지 따라가던 안티고노스와 합류했다. 아라코시아의 사트라프 시비르티우스는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판단하여 자신의 지역으로 돌아갔고, 에우메네스와 그의 동맹군은 붕괴 직전에 있었다. 안티고노스와 에우메네스는 파라이타케네와 가비에네에서 두 차례 전투를 벌였고, 에우메네스는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셀레우코스는 이 과정에서 신중하게 때를 기다리는 전략을 보여주었다.[21]

기원전 316년 파라에타케네 전투가비에네 전투 이후,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를 패사시켰지만, 셀레우코스는 안티고노스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다. 영토 재분배 문제로 안티고노스와 결별한 셀레우코스는 기원전 315년 바빌론을 탈출하여 이집트로 도망쳐 프톨레마이오스와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312년 봄 가자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와 함께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를 격파한 셀레우코스는, 안티고노스가 시리아로 출진한 틈을 타 동방으로 귀환했다. 바빌론 주민들의 지지를 받은 셀레우코스는 같은 해 10월 1일 바빌론을 회복했고, 이는 일반적으로 '''셀레우코스 제국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3. 2. 안티고노스와의 대립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세상을 떠난 후, 셀레우코스는 페르디카스를 따랐다. 기원전 321년 바빌론 회의에서 페르디카스는 제국 각지의 사트라프 자리를 분배했고, 프톨레마이오스이집트를 받았다. 안티파트로스, 크라테로스, 안티고노스, 프톨레마이오스는 페르디카스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셀레우코스는 페르디카스를 암살하고, 트리파라데이소스 협정에서 바빌로니아의 총독 자리를 얻었다.[16]

트리파라데이소스 협정에서 장군들은 에우메네스를 제거하기로 합의했고, 기원전 319년 안티고노스가 에우메네스를 공격했다. 안티파트로스가 사망하고 폴리페르콘이 새 섭정이 되자, 카산드로스는 안티고노스, 리시마코스, 프톨레마이오스와 동맹을 맺었다. 카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를 장악하고 올림피아스를 처형했다.

안티고노스에게서 탈출한 에우메네스는 메소포타미아로 이동했으나, 기원전 315년 안티고노스에게 처형당했다. 안티고노스는 아나톨리아에서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이란에 이르는 영토를 장악했고, 셀레우코스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도망쳤다.[24]

안티고노스의 세력이 강해지자 기원전 314년 프톨레마이오스,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가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312년 가자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가 승리하고, 셀레우코스는 바빌론을 수복했다. 안티고노스와 프톨레마이오스는 휴전 협정을 맺었고, 카산드로스는 알렉산드로스 4세와 록사나를 죽였다. 셀레우코스는 동쪽으로 영향력을 확대했고, 안티고노스는 기원전 311년부터 309년까지 바빌론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기원전 308년 카산드로스는 폴리페르콘과 화해했고, 프톨레마이오스는 안티고노스와 협력했으나 무산되었다. 기원전 306년 데메트리오스가 키프로스를 장악하고,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오스는 왕을 칭하기 시작했다. 카산드로스는 안티고노스를 대적하기 위해 리시마코스,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기원전 301년 이프소스 전투에서 셀레우코스가 승리하여 안티고노스는 전사했다.

셀레우코스는 마우리아 제국과 셀레우코스-마우리아 전쟁을 벌였으나, 기원전 303년 평화 협정을 맺고 인도코끼리 500마리를 얻었다. 이 코끼리들은 이프소스 전투에서 큰 역할을 했다.

3. 3. 바빌로니아 전쟁과 동방 영토 확장

셀레우코스는 트리파라데이소스 협정에서 바빌로니아 속주를 받았다.[16] 이는 안티고노스의 아이디어였을 수도 있다. 셀레우코스의 바빌론은 페르시스의 사트라프인 페우케스타스, 수시아나의 새로운 사트라프인 안티게네스, 메디아페이톤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다.[16]

펠라의 아르콘이 이미 바빌론의 사트라프로 임명되었으나, 페르디카스는 도키모스를 후임자로 임명하려 했다. 셀레우코스가 도키모스로부터 바빌론을 어떻게 빼앗았는지는 불확실하지만, 한 바빌론 연대기에 따르면 기원전 320년 여름이나 겨울에 도시의 중요한 건물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다른 자료에는 셀레우코스가 기원전 320년 10월 또는 11월에 바빌론에 도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8]

한편, 메디아의 사트라프 페이톤은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안티고노스와 에우메네스는 전쟁을 벌였다. 셀레우코스는 바빌론 자체의 문제와 더불어 에우메네스, 안티고노스, 페이톤 등의 세력 다툼 속에서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수시아나의 사트라프이자 아르기라스피데스의 지휘관인 안티게네스는 에우메네스와 동맹을 맺었다.[19]

셀레우코스는 금품과 뇌물로 바빌론 사제들을 매수하고,[18] 티그리스강을 건너려는 에우메네스를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다.[20] 기원전 316년 봄, 셀레우코스와 페이톤은 에우메네스를 추격하던 안티고노스와 합류했다. 안티고노스와 에우메네스는 파라이타케네 전투와 가비에네 전투에서 두 차례 전투를 벌였고, 에우메네스는 패배하여 처형되었다.[21]

안티고노스는 기원전 316년 겨울을 메디아에서 보내며 페이톤을 처형하고 페르시아의 사트라프인 페우케스타스를 대신했다.[22] 기원전 315년 여름, 안티고노스는 바빌론에 도착했고 셀레우코스는 그를 환영했지만, 둘의 관계는 곧 틀어졌다. 셀레우코스는 안티고노스의 허락 없이 장교 중 한 명을 처벌했고, 안티고노스는 셀레우코스에게 속주의 수입을 요구했지만, 셀레우코스는 거부했다.[23] 칼데아 점성가들이 셀레우코스가 아시아의 지배자가 되어 안티고노스를 죽일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현대 학자들은 회의적이다.[24] 셀레우코스는 안티고노스를 두려워하여 기병 50명을 이끌고 이집트로 도망쳤다.[23]

셀레우코스는 이집트에서 프톨레마이오스, 리시마코스, 카산드로스와 함께 안티고노스에 대항하는 연합을 결성했다. 이들은 안티고노스에게 영토 분배를 요구했지만, 안티고노스는 거절했다.[25] 셀레우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제독으로 활동하며 키프로스에서 키티온을 포위했다. 기원전 312년 가자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가 데메트리오스를 격파하고, 안티고노스가 임명한 바빌론의 사트라프 페이톤이 사망하자, 셀레우코스는 바빌론으로 돌아갈 기회를 잡았다.[28]

셀레우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받은 병력, 친구들, 그리고 모집한 군인들을 합쳐 약 3,000명의 병력으로 바빌론을 빠르게 정복했다.[29] 그의 바빌론 귀환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시작으로 여겨졌고,[35] 그 해는 셀레우코스 시대의 첫 해로 간주되었다.

셀레우코스가 돌아온 직후, 안티고노스의 지지자들은 바빌론을 되찾으려 했다. 니카노르와 아리아의 사트라프 에바고라스가 군대를 이끌고 왔지만, 셀레우코스는 늪지에 군대를 숨기고 기습하여 격파했다. 에바고라스는 전투 초반에 사망했고, 니카노르는 소수의 병력과 함께 도망쳤다.[30]

바빌론의 사트라프가 된 셀레우코스는 메디아와 수시아나를 정복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셀레우코스가 페르시스, 아리아, 파르티아 등 인근 지역도 정복했다고 기록했다.[32]

셀레우코스는 동쪽으로 시선을 돌려 마우리아 제국찬드라굽타와 전쟁을 벌였다. 기원전 303년, 셀레우코스는 동방을 안정시키고 아라코시아, 게드로시아, 파로파미사다이와 아리아 일부를 포기하는 대신 500마리의 전쟁 코끼리를 얻었다. 마우리아 왕은 셀레우코스의 딸과 결혼했을 수도 있다.

스트라본에 따르면, 양도된 영토는 인더스 강과 접해 있었다.[43] 셀레우코스는 페르시아 만과 인도양에 해군을 창설했을 수 있다.[38]

3. 4. 마우리아 왕조와의 협정

셀레우코스는 곧 동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디아도코이 전쟁을 통해 그의 제국이 분열되면서,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는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영토를 차지하려 했다. 로마 역사가 아피아누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셀레우코스는] 항상 인접 국가들을 엿보고, 무기가 강력하고 협상력이 뛰어나, 메소포타미아, 아르메니아, '셀레우코스' 카파도키아, 페르시스, 파르티아, 박트리아, 아라비아, 타푸리아, 소그디아, 아라코시아, 히르카니아, 그리고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정복된 인더스 강까지의 다른 인접 민족들을 획득하여 그의 제국의 경계는 알렉산드로스 이후 아시아에서 가장 광범위했다. 프리지아에서 인더스에 이르는 지역 전체가 셀레우코스에게 복종했다.

>

> — 아피아누스, ''로마사'', 시리아 전쟁 55

마우리아 제국은 인더스 강 주변의 네 명의 그리스 사트라프(총독): 니카노르, 필리포스, 에우데모스 및 페이톤이 지배하는 지역을 합병하여 인더스 강둑까지 지배권을 확립했다. 찬드라굽타의 승리는 셀레우코스가 동쪽 측면을 확보해야 함을 확신시켰다. 그곳의 마케도니아 영토를 유지하려 했던 셀레우코스는 인더스 계곡을 놓고 새롭게 부상하고 확장하는 마우리아 제국과 갈등을 겪게 되었다.

기원전 306년,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는 인도로 가서 인더스 강까지 영토를 점령한 것으로 보이며, 결국 마우리아 황제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전쟁을 벌였다. 그의 인도 활동에 대해 언급하는 자료는 거의 없다. 마우리아 제국의 창시자 찬드라굽타(그리스 자료에서는 ''산드로코토스'')는 인더스 계곡과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다른 동부 지역을 정복했다. 셀레우코스는 찬드라굽타에 대한 원정을 시작하여 인더스 강을 건넜다. 대부분의 서방 역사가들은 그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황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언급한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두 지도자는 결국 합의에 도달했고, 기원전 303년에 체결된 조약을 통해,[42] 셀레우코스는 동방을 안정시키고, 서방의 강력한 경쟁자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에 대항할 수 있는 코끼리를 얻기 위해 안전하게 지킬 수 없었던 영토를 포기했다. 셀레우코스가 찬드라굽타로부터 얻은 500마리의 전쟁 코끼리는 앞으로 벌어질 전투, 특히 이프소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오스에 대항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우리아 왕은 셀레우코스의 딸과 결혼했을 수도 있다. 스트라본에 따르면, 양도된 영토는 인더스 강과 접해 있었다.

> 부족들의 지리적 위치는 다음과 같다. 인더스 강을 따라 파로파미사다이가 있고, 그 위에는 파로파미수스 산이 있다. 그런 다음 남쪽으로 아라코티가 있다. 그런 다음 남쪽으로 게드로세니가 있고, 해안을 점령하는 다른 부족들이 있으며, 인더스 강은 위도상으로 이 모든 장소와 나란히 놓여 있다. 이 장소 중 일부는 인더스 강을 따라 위치하며, 과거에는 페르시아에 속했지만 현재는 인도인들이 점유하고 있다. 알렉산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3세 '대왕']는 아리아인으로부터 이것들을 빼앗아 자신의 정착지를 세웠지만,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는 상호 결혼과 500마리의 코끼리를 받는 조건으로 산드로코토스 [찬드라굽타]에게 그들을 넘겨주었다.

>

> — 스트라본 15.2.9[43]

이로부터 셀레우코스는 아라코시아, 게드로시아, 파로파미사다이 속주의 가장 동쪽 지역과 아마도 아리아를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그는 동부 속주의 다른 사트라프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의 페르시아인 아내 아파마는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에서 그의 통치를 시행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수 있다.[44][45] 이는 고고학적으로도 뒷받침될 가능성이 있는데, 예를 들어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남부의 칸다하르에서 발견된 아쇼카 칙령과 같은 마우리아의 영향력의 구체적인 징후가 있기 때문이다.

일부 저자는 현재 남부 아프가니스탄에 해당하는 영토를 셀레우코스가 넘겨주었다는 주장은 플리니우스의 진술에서 비롯된 과장이라고 말하는데, 플리니우스는 찬드라굽타가 받은 땅이 아니라 "인도"라는 단어의 정의에 대한 다양한 지리학자들의 의견을 언급했다.[47]

> 사실 대부분의 지리학자들은 인도를 인더스 강으로 경계를 짓지 않고 게드로스, 아라코테, 아리아, 파로파미사다에, 코페스 강의 4개 사트라피를 더하여 인도의 극단적인 경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다른 작가들에 따르면 이 모든 영토는 아리아 지역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

> — 플리니, 박물지 VI, 23[48]

마우리아의 통치 범위 또한 현재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의문을 제기받고 있으며, 양도된 영토에 아리아와 게드로시아(발루치스탄)가 모두 포함되었다는 생각은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49]

찬드라굽타와 셀레우코스의 동맹은 결혼(에피가미아)으로 확인되었다. 찬드라굽타 또는 그의 아들은 셀레우코스의 딸과 결혼했을 수도 있고, 아마도 인도인과 그리스인의 상호 결혼에 대한 외교적 인정을 받았을 수도 있다. 또한, 인도 푸라나 출처인 ''프라티사르가 파르바''는 찬드라굽타가 셀레우코스의 딸인 그리스인("야바나") 공주(인도 자료에서는 ''술루바''[50])와 결혼한 것을 묘사했다.[51]

이러한 결혼적 인정이나 동맹 외에도 셀레우코스는 대사 메가스테네스파탈리푸트라 (현대 비하르 주의 파트나)의 마우리아 궁정으로 파견했다. 메가스테네스가 이 여행에 대해 묘사한 내용은 짧게 발췌되어 남아 있다.

두 통치자는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며, 고전 자료에는 그들의 조약 이후 찬드라굽타가 최음제와 같은 다양한 선물을 셀레우코스에게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52]

셀레우코스는 플리니우스가 마우리아 제국에 대한 수많은 대사관을 통해 설명한 바와 같이 북부 인도의 대부분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의 가장 먼 지점인 히다스페스를 넘어선 나라의 다른 지역들은 셀레우코스 니카토르에 의해 발견되고 조사되었다. 즉,

> * 거기서(히다스페스)부터 헤수드루스까지 168마일

> * 이오아메스 (야무나) 강까지 그만큼, 어떤 사본에는 5마일이 더 추가됨

> * 거기서 갠지스 강까지 112마일

> * 로다파까지 119마일, 어떤 사람들은 그 두 곳 사이가 325마일 이상이라고 말한다.

> * 거기서 칼리니팍사라는 큰 마을까지 167.5마일, 다른 사람들은 265마일이라고 말한다.

> * 그리고 이오마네스 강과 갠지스 강이 만나는 지점까지, 두 강이 합류하는 지점까지 225마일, 많은 사람들이 13마일을 더 추가함

> * 거기서 팔리보타 마을까지 425마일

> * 그리고 갠지스 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곳까지 638마일.

>

> — 플리니우스, 박물지, 제6권, 21장[54]

셀레우코스는 인도로 머무는 동안 동전을 주조한 것으로 보이며, 그의 이름이 새겨진 여러 동전이 인도 표준에 따라 인도에서 발굴되었다. 이 동전들은 그를 "바실레우스"("왕")라고 묘사하는데, 이는 기원전 306년 이후의 시기를 의미한다. 그들 중 일부는 또한 셀레우코스를 그의 아들 안티오코스와 함께 왕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기원전 293년까지의 시기를 의미할 것이다. 이후 인더스 서쪽의 영토를 찬드라굽타에게 반환했음을 확인하는 셀레우코스 동전은 인도에서 주조되지 않았다.[55]

셀레우코스는 페르시아 만과 인도양에 해군을 창설했을 수 있다.[38]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망하자 셀레우코스는 제국 섭정을 칭한 페르디카스를 따랐으나, 기원전 321년 동료 장군들과 함께 페르디카스를 암살했다. 트리파라디소스 군회에서 셀레우코스는 바빌로니아총독 자리를 얻어 디아도코이로서의 입지를 확립했다.

기원전 316년 이란 남부의 파라에타케네 전투가비에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를 패사시켰다. 그러나 셀레우코스는 안티고노스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고, 기원전 315년 바빌론을 탈출하여 이집트로 도망쳐 프톨레마이오스와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312년 가자 전투에서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를 격파한 후, 셀레우코스는 바빌론을 회복했다.

이후 셀레우코스는 안티고노스의 공격을 받았지만, 티그리스 강변에서 니카노르를 격파하여 바빌로니아의 지배를 확립했다(바빌로니아 전쟁). 셀레우코스는 기원전 305년에 중앙 아시아·인도 방면으로 군대를 진격시켰다.

셀레우코스는 인더스 유역에서 마우리아 왕조의 초대 왕 찬드라굽타와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으로 셀레우코스는 간다라게드로시아 등 동부 변경 지역을 할양하고, 자신의 딸을 찬드라굽타의 아들 빈두사라의 비로 마우리아 왕조의 후궁에 들이는 대가로, 찬드라굽타로부터 500마리의 전차를 획득했다. 이는 입소스 전투에서 그의 승리에 큰 공헌을 했다.

서방으로 돌아온 셀레우코스는 반 안티고노스 동맹에 가담했다. 기원전 301년 입소스 전투에서 셀레우코스-뤼시마코스 연합군은 안티고노스-데메트리오스 부자를 격파했고, 셀레우코스는 아시아에서의 패권을 확립했다.

3. 5. 이프소스 전투와 셀레우코스 제국의 확립

기원전 301년 아나톨리아 중부의 이프소스에서 벌어진 〈이프소스 전투〉는 디아도코이 전쟁 중 가장 큰 규모의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셀레우코스 1세와 리시마코스 연합군은 안티고노스 1세와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 부대를 격파했다. 셀레우코스는 찬드라굽타에게서 받은 전차를 활용하여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안티고노스는 전사했으며 데메트리오스는 패주했다. 이 승리로 셀레우코스는 아시아에서의 패권을 확립했다.[58]

셀레우코스가 이러한 '역습'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서방에서 디아도코이들이 각축전을 벌이는 동안, 동방 영토를 차례로 차지한 것이 있었다. 찬드라굽타마우리아 제국과의 셀레우코스-마우리아 전쟁에서 기원전 303년 아라코시아, 게드로시아, 드란기아나 및 인도 접경 영토를 마우리아 제국에게 양도하고 딸을 찬드라굽타와 결혼시키는 대신 인도코끼리 500마리를 받는 조건으로 평화 협정을 맺었다. 이로써 셀레우코스는 페르시아 기병과 인도 코끼리를 동원한 압도적인 전력으로 안티고노스에게 결정타를 가할 수 있었다.[58]

입소스 전투 결과, 셀레우코스는 헬레니즘 국가들 중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시리아 북부와 아나톨리아 중부를 획득했다. 그는 새로운 왕국의 수도로 안티오키아를 건설했는데, 이 도시는 기원전 300년 5월 22일에 시리아의 오론테스 강변에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그의 아버지 안티오코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는 그 외에도 어머니의 이름을 딴 라오디케이아, 아내의 이름을 딴 아파메이아 등 많은 도시를 건설했다. 특히 티그리스 강변에 건설된 셀레우키아는 왕국의 제2의 도시로서, 과거의 바빌론을 대신하여 번영을 누리게 된다.[60]

또한 시리아, 셀레우키아 등에 미치는 광대한 지배권을 72개의 행정구로 재편하고, 영역 내에서의 통화의 통일을 추진했으며, 장남 안티오코스에게 데메트리오스의 딸이자 한때 자신의 총비였던 스트라토니케를 주어 부왕으로 임명하고 왕국 동부의 지배를 위임했다 (기원전 294년).[35] 그는 이윽고 유럽에도 판도를 확대하여, 흑해와 아조프 해, 카스피 해를 거대한 운하로 잇는 구상을 품고 있었다고도 한다.

4. 셀레우코스 왕조의 확립과 죽음

안티고노스 1세는 아들 데메트리오스를 보내 바빌론을 재정복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셀레우코스는 바빌론을 굳건히 방어했고, 데메트리오스는 결국 퇴각해야 했다. 디오도코이 간의 권력 투쟁은 기원전 306년에 안티고노스가 스스로 왕을 선포하면서 절정에 달했고, 프톨레마이오스, 리시마코스, 카산드로스, 셀레우코스도 뒤따라 왕(바실레우스)의 칭호를 얻었다.[35]

입소스 전투 이후 셀레우코스는 시리아 북부와 아나톨리아 중부를 획득했다. 그는 오론테스 강변에 새로운 도시 안티오키아를 건설하여 수도로 삼고, 라오디케이아, 아파메이아 등 여러 도시를 건설했다.[59] 티그리스 강변의 셀레우키아는 제2의 도시로 번영했다.

기원전 294년, 셀레우코스는 아들 안티오코스에게 데메트리오스의 딸 스트라토니케를 주어 결혼시키고, 제국 동부의 부왕으로 임명했다.[61] 기원전 288년에는 마케도니아를 잃고 재기를 노리던 데메트리오스를 사로잡아 기원전 283년 그가 죽을 때까지 시리아에 감금했다.

기원전 281년, 코루페디온 전투에서 셀레우코스는 리시마코스를 패사시켰다.[59] 이로써 디아도코이 중 마지막 생존자가 된 셀레우코스는 알렉산드로스 제국 재통일에 가장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원정 중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게 암살당했다.[35] 그의 유해는 시리아의 셀레우키아에 안장되었다.

4. 1. 셀레우코스 제국의 행정

셀레우코스 1세는 자신의 이름을 딴 광대한 셀레우코스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제국을 72개의 행정구로 재편했다.[59] 각 행정구는 지방 총독(사트라프)이 다스렸으며, 제국 내 통화 통일을 추진했다.

오론테스 강변에 건설된 안티오키아를 제국의 수도로 정하고, 라오디케이아, 아파메이아 등 여러 도시를 건설하여 제국의 기반을 다졌다.[59] 특히 티그리스 강변에 건설된 셀레우키아는 제2의 도시로서, 과거의 바빌론을 대신하여 번영했다.

셀레우코스는 장남 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에게 데메트리오스의 딸 스트라토니케를 주어 부왕으로 임명하고 왕국 동부의 지배를 위임했다. (기원전 294년)[59]

소아시아 지역의 행정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 지역은 그리스 도시, 페르시아 귀족, 토착 민족 등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59] 카파도키아 정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페르가몬필레타이로스는 독립적인 통치를 유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셀레우코스는 소아시아에 많은 새로운 도시들을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셀레우코스는 여러 도시와 사원에 편지를 보내 소통을 유지했다. 소아시아의 모든 도시들은 새로운 통치자에게 사절단을 보냈고, 셀레우코스는 그가 받은 편지의 수에 대해 불평하며 그것들을 읽어야만 했다고 한다. 그는 레므노스에서 해방자로 칭송받고 그를 기리는 신전이 세워질 정도로 인기 있는 통치자였다.[59]

4. 2. 죽음과 유산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의 장남이자 후계 다툼에서 밀려나 망명해 온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게 암살당했고, 셀레우코스의 아들인 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가 그를 이어 왕이 되었다.[35][62]

셀레우코스는 기원전 281년 9월 리시마키아 근처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게 암살당했다.[35][62] 그는 트라키아 헤르소네소스를 건너자마자 암살당했는데,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를 점령한 후 그리스를 정복하려 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는 이미 자신에게 주어진 수많은 선물을 사용하여 이 작전을 준비했고, 아테네의 명예 시민으로 임명되었다.[63]

기원전 281년, 코루페디온 전투에서 리시마코스를 패사시킨 셀레우코스는 디아도코이 중 마지막 생존자가 되었다. 과거 안티고노스조차 이루지 못했던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재통일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는 영토와 권세를 얻게 된 그는 절정기를 맞이했다. 셀레우코스는 더 나아가 리시마코스가 지배했던 고국 마케도니아에 세력을 확대하려 원정을 시작했으나, 고국에 개선하는 것이 눈앞에 보이던 중 헬레스폰토스 해협 건너편 리시마키아의 진영에서 마케도니아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은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아들)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유해는 시리아의 셀레우키아로 운반되어, 이곳의 묘 니카토레이온에 안장된다.

안티오코스 1세는 자신의 아버지 셀레우코스 1세 사후에 그를 신격화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후기 구성원들을 중심으로 인격 숭배가 형성되었고, 셀레우코스는 나중에 제우스 니카토르의 아들로 숭배되었다.[64] 트로이인 일리움에서 발견된 한 비문은 사제들에게 안티오코스 가문의 조상인 아폴론에게 희생을 바치라고 권고한다. 셀레우코스의 삶에 대한 몇 가지 일화는 고전 세계에서 인기를 얻었다.[64]

석회암 부조 조각으로 세 사람이 등장하는데, 오른쪽 인물(군복 차림)이 가운데 인물의 머리 위에 왕관을 씌워주고 있다.
두라의 가드(행운)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를 보여주는 컬트 부조.


도시 건설자로서의 셀레우코스의 명성은 그가 죽은 후에도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시리아의 두라-유로포스 유적지에서 발굴된 사원 부조에는 도시의 건설자로서 셀레우코스가 두라의 가드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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